바다의 기별
사랑은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다.
너는 이인칭인가 삼인칭인가?
이름과 부름 사이의 거리.
동물들은 모두 다 제 똥과 오줌과 제 몸의 냄새를 풍긴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 오지 않는 것들과
모든, 참흑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랑이라고 부른다.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어서, 30년이 지난 무덤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슬프지 않고,
슬픔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래지는 또 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고,
슬픔이 다가와 가까운 슬픔의 자리를 차지 했던 것인데,
이 풍화의 슬픔은 본래 그러한 것이어서 울 수 있는 슬픔이 아니다.
우리 남매들이 더 이상 울지 않는 세월에도, 새로 들어온 무덤에서는 사람들이 울었다.
이제는 울지 않는 자들과 새로 울기 시작한 자들 사이에서 봄마다 자들은 푸르게 빛났다.
달릴 곳 없는 시대의 황무지에서 좌충우돌하면서 몸을 갈고 있었다.
불모한 시대의 황무지에 인간의 울분과 열정을 뿌리고 갔다.
무사한 날들이 쌓여서 행복이 되든지 불행이 되든지,
그저 하루하루가 별 탈 없기를 바랐다.
순하게 세월이 흘러서 또 그렇게 순하게 세월이 끝나기를 바랐다.
다시 눈을 뜨고 이 살아 있는 동안의 시간들을 들여다 보니, 거기서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고 누렇고 붉은 열매들이 열린다.
그리고 태어난 모든 것들은 사라진다.
시간 속에서는 덧 없는 것들만이 영원하다.
모든 강고한 것들은 무너지지만, 저녁노을이나 아침이슬은 사라지지 않는다.
갓난아이가 여자로 자라는 기적과, 영원히 덧없는 것들의
영원함만이 구덩이를 기다리는 이 무시한 그날그날의 행복이다.
나의 행복은 이처럼 작고 초라한 것이다.
종말은 선명했고, 가벼웠다.
삶의 종말은 참혹하게도 명석했다.
나는 죽음의 보편성과 생명의 개별성에 관해서 생각했다.
인간은 보편적 죽음 속에서, 그 보편성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이 혼자서 죽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이다.
다들 죽지만 다들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은 언어화되지 않고 공유되지 않는다.
병은 나 자신의 생명속에서 발생한 실존적이고도 사적인 현상이다.
내 병은 나의 생명현상의 것이다.
나는 내 병을 남에게 맡겨야 하는 나의 이 속수무책을 슬퍼한다.
생로병사에 거역하는 길이 아니라 생로병사와 함께 흘러가는 길이다.
그는 건설하는 자라기보다는 거부하는 자이고,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삶의 정당한 자리를 확보하려는 자이다.
이념이나 추상이 얼씬거리지 못하는 자리에서,
삶의 구체성은 뒤엉켜서 들끓고, 힘찬 무질서들로 생동한다.
칠장사는 여전히 세속의 일부일 뿐이다.
도둑들에게 칠장사는 여전히 세속의 왁자지껄함과 세속의 거래와
세속의 질서와 세속의 호기심으로 넘쳐나는 곳이었다.
나는 글을 몸으로 쓴다.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없으면 단 한줄도 쓰지 못한다.
연필을 쥔 손아귀와 손목과 어깨에 사유의 힘이 작동되어야 글을 쓸 수 있다.
그리고 몸과 사유를 연결시켜서 글로 옮길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리듬이다.
나는 이 리듬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 리듬은 살아 있는 생명 속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이 리듬은 비논리적인 것이고 오직 시간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글을 쓸 때 나는 작곡을 생각한다. 글은 몸속의 리듬을 언어로 표현해내는 악보이다.
그런데 어떤 언어들은 저편의 실체를 향하여 따스하고 편안하게 나를 인도해 준다.
그 언어들은 순하고 명석하다.
그 순한 언어의 징검다리를 딛고 서 있을 때도 나는 그 징검다리를 벗어나려고 안달한다.
실체 앞에서 언어를 그리워하고, 언어 앞에서 실체를 그리워한다.
나는 해독되지 않는 시간의 그림자를 버리고 다시 언어쪽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 편이 훨씬 더 아늑하고 편안할 것이다.
내가 그 시들을 읽은 것이 아니라, 그 시들이 나에게 흘러들어온 것처럼 내 마음에 스몄다.
강가에 앉은 사람처럼, 흘러가는 시간을 보내고,
지나간 시간과 다가오는 시간의 모습을 낮게 주절거린다.
나는 어두운 갯벌의 가장자리에 주저앉아 있다.
시를 쓰지 못하는 나는 이 자리가 시가 쓰여지는 자리라고 생각한다.